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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0426 ~ 16160423
남, 워릭셔주 Stratford-upon-Avon (영국), 극작가, 시인, 배우

작성일 19-03-17 16:17 1,849회 0건

" 선한 친구여, 제발 부탁이니 여기 묻힌 흙을 파내지 마오. 이 돌들을 그대로 두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내 유골을 움직이는 자에게는 저주 있으리라
Good Friends, for Jesus' sake forbear, To dig the bones enclosed here!
Blest be the man that spares these stones, And curst be he that moves my bones.

( ※ 셰익스피어 당시엔 무덤 지기가 새로운 시신을 매장할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전에 묻혀있던 시신을 파내서
      화장하는 일이 흔히 있었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를 우려한 것 같으며, 한편 영원히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은
      소망을 표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



약력
윌리엄 셰익스피어(영어: 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는 영국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잉글랜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런던으로 이주한 뒤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일약 유명세를 탔고, 생전에 '영국 최고의 극작가' 지위에 등극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과 같이 인간의 내면을 통찰한 주옥같은 걸작을 남겼으며, 그의 희곡은 인류의 고전으로 남아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당대의 여타 작가와 달리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그 자체로부터 깊은 생각과 뛰어난 지식을 끌어모은 셰익스피어는 당대 최고의 희곡가로 칭송받는다.

● 유년기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존 셰익스피어의 집,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의 전형적인 소읍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부부의 맏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한 데다가 읍장까지 지낸 유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와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11세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스어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그리 유창하지 않았다. 동시대 극작가 벤 존슨은 “라틴어에도 그만이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를 조롱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고등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 결혼
셰익스피어는 18세에 여덟 살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우스터의 성공회관구의 교회 법정에서는 1582년 11월 27일에 혼인 허가를 내주었고, 해서웨이의 두 이웃은 결혼을 막을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음을 보증하는 보증서를 다음 날 보냈다. 셰익스피어의 생애에서 세례일과 결혼일을 제외하고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둘은 1583년 5월 23일에 딸 수잔나(Susanna)를 낳았다. 앤은 시대에 비추어 보아도 그리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연상인 아내를 그리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 모종의 이유로 셰익스피어는 1585년에 햄닛(Hamnet)과 주디스(Judith)라는 쌍둥이가 태어난 후 곧장 고향을 떠나 7~8년 간 떠돌아다닌다. 이 유랑기 동안의 행적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런던과 극작 활동
1580년대 후반,또는 1590년 경 런던에 도착한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하고 있던 수도 런던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이 시기 런던은 많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몹시 붐비고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여 도시는 지저분해지고 수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런던의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경제 활동, 각양각색 문화 활동과 행사, 특히 대중의 여흥을 위해 빈번히 열린 연극은 셰익스피어가 성장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동 시대 극작가 로버트 그린의 기록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1592년에는 런던에서 유명한 극작가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가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 품격이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594년부터 셰익스피어는 당시 런던 연극계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궁내부장관 극단의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

1599년 템스 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한 궁내부장관 극단은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승하하고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1594) 등 장시(長詩) 두 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서 활동한 기간은 1590년 ∼ 1613년까지 대략 24년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희·비극을 포함하여 작품을 총 38편 발표하였다. 159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다. 특히 《헨리 6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1]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도 안 나온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유명세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비극(로마극 포함)10편, 희극 17편, 사극 10편, 장시 몇 편과 시집 《소네트》를 집필하였고,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이 시기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짐작케 하는 말로는 엘리자베스가 남긴 어록이 꼽힌다. "영국은 넘길 수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못 넘긴다."

● 말년과 죽음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전기를 출간한 작가 로우(Rowe)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몇 년 전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당시에 모든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일은 보기 드문 경우였고, 말년에도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계속 방문하였다. 1612년에는 마운트조이의 딸 메리의 혼인 신고와 관련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받았다. 1613년 3월에는 과거에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소 수도원 이었던 문루(gatehouse)를 사들였다.
1614년 11월에는 내과 의사이자 사위인 존 홀과 함께 몇 주간 런던에서 지냈다.

1606년에서 1607년을 전후하여 셰익스피어는 몇 편 안 되는 희곡을 썼으나 1613년 이후에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10] 마지막으로 쓴 희곡 세 편은 아마도 극작가인 존 플레쳐와 함께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존 플레쳐는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어 왕의 수족을 위한 실내극을 창작하였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6일에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맏딸 수잔나는 내과의사 존 홀과 1607년에 결혼하였으며, 작은딸 쥬디스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두 달 전에 포도주 제조 업자 토마스 퀸네이와 결혼하였다. 수잔나는 셰익스피어의 부동산을 물려받았는데, 유언장에 따르면 그녀는 그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여 '그녀의 몸에서 낳은 첫 아들'에게 상속해야 했다. 둘째 사위 퀸네이는 자식을 셋 두었으나 모두 결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홀의 외동딸인 엘리자베스도 두 차례 결혼하였지만 1670년에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면서 셰익스피어의 직계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유언에서 당시 법에 따라 재산의 3분의 1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을 아내 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 마디를 남겼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나의 두 번째 좋은 침대"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언급한 침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립하였다. 일부 학자는 그 침대가 실제 물건이 아니라 앤에게 모욕을 주려고 한 말이라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진짜 그런 침대가 있었고, 의미 있는 유산이었으리라고 믿는다.

셰익스피어는 고향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안장되었다. 그의 흉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 대지는 그를 덮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올림푸스는 그를 소유한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C%8C%EB%A6%AC%EC%97%84_%EC%85%B0%EC%9D%B5%EC%8A%A4%ED%94%BC%EC%96%B4
출처: NEWS1 (셰익스피어는 왜 죽은지 400년 된 지금까지 계속 위대한가?)
http://news1.kr/articles/?2546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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