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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金載圭 19260306 ~ 19800524
남, 경상북도 구미시 (한국), 군인, 정치인

작성일 19-04-19 22:48 2,585회 1건

" 자유를 회복시킨 것은 진리를 회복시킨 것이니 죽을 때에는 `대한민국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0ㆍ26 혁명 만세만은 부르고 가자. 지금 우리는 가지만
10ㆍ26혁명만은 언젠가 빛을 보게 마련이다 라는 말을 부하들에게 전해달라
(사형을 앞두고) "



약력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제9대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전국구),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이며 호는 덕산(德山)이다.
대통령과 대통령경호실장 사살(10·26 사건) 혐의로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되었다.

● 학력
안동고등농림학교 졸업 대구농업전문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2기 육군대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과 졸업 (공학석사)

● 군인 생활
박정희의 동향(경상북도 구미)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다.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다. 그러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다. 1952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3년 부터 1973년 까지는 보병제6사단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 군사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
1973년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해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 박정희 암살과 사형
그러나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YH貿易 女工 籠城 事件),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수습하면서,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시국 수습책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徹) 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차지철과 그를 옹호하는 박정희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주프랑스 공사 이상열(李相悅)을 매수하여 1979년 10월 7일 전(前)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을 유인 살해하도록 유도한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 10.26 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경기도 포천소제에 있는 사단 본부 박물간에 역대 사단장 사진이 있는데
그중에 이분 사진만 제거가 되어있다 (이사건 때문에 사진이 철거가 되었다)

● 박정희 암살의 동기
- 김재규 본인의 변론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과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우발적 범죄설
김재규 본인은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알려진 정설은 박정희의 무조건적인 차지철 신임과, 그로 인한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 때문에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것이다.

● 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2]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3]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 김형욱 살해 지시
2005년 5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1979년 9월 말 이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연수생 2명을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연수생 A는 제3국인 2명에게 살인 청부를 하여 이들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끌고갔고, 제3국인이 권총으로 김형욱을 살해한 뒤 낙옆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후 연수생 B는 제3국인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를 지급하였다. 관저에서 연수생 A로부터 결과를 보고받은 이상열은 증거를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귀국한 A는 1979년 10월 13일 경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결과를 보고 받은 김재규는 A를 중앙정보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하며 살해에 가담한 B와 나눠 갖도록 했다.

● 재평가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으며,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 와 같은 주장도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을 계기로 재평가 목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이 김재규 묘소를 방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알리는 신문들과 꽃다발, 시바스 리갈 등 술병 등을 놓고 갔다고 한다. 또한 명예회복 사업을 하기 위해 1000만원 모금운동을 한 모 포털사이트의 스토리펀딩은 2017년 1월 모금에 성공했다. 김재규 관련 책들도 국정농단 사태 이후 판매량이 18배 이상 올랐고, 온라인에서는 김재규 사진이 담긴 옷이 판매되고, 이 수익금으로 흉상을 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 상훈
충무무공훈장,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천수장·삼일장·국선장·광복장·통일장과 킹압둘아지즈훈장(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받았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E%AC%EA%B7%9C
출처: 중앙일보 (박근혜 파면된 날, 김재규 묘에 시바스리갈 놓인 까닭)
https://news.joins.com/article/21376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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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지마인 작성일

● 그것이알고싶다 12.12사태의 시발점!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  https://youtu.be/pVXlIbGDM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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