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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全琫準 1854-12-03 ~ 1895-04-24
남, 전라도 정읍 (한국), 농민 운동가, 동학의 종교 지도자

작성일 20-12-20 22:27 126회 0건

"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유시(遺詩)를 남기며
자신의 피를 종로거리에 뿌려 줄것을 당부하였음.
時來天地皆同力 (때가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과실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



약력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전봉준이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 산외리 동곡(山外里 東谷) 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주 01)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주 02)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주 03)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다.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전봉준은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1894년 4월 4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들어왔다.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주 04)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전봉준(全琫準))]

※ 의금부의 옥에 갇힌 전봉준 등에게는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의금부의 공초 중에는 그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사실 여부의 추궁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만났느냐는 추궁에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고문은 계속되었으나 자백이 없자 일본 영사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후 음력 2월 9일, 음력 2월 11일, 음력 2월 19일, 음력 3월 7일, 음력 3월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관에 설치된 헌병의 심문을 받았으나 역시 목적이나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다가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하였다. 당시 상처가 아물지 않아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가 없어 아리(衙吏)가 그를 안고 사형장으로 갔다. 이때 그의 형제들도 연좌되어 사형당했고, 그의 후처 여산송씨는 끌려가 노비가 되었다.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향년 41세였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유시(遺詩)를 남겼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유시(遺詩)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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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B4%89%EC%A4%80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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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선배님들의 묘비명누구나 지구에 왔다가 한동안 머물고 다시 돌아갑니다. 먼저 가신 훌륭하신 선배님들의 묘비명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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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I stand for you Promise Devotion Destiny Eternity and Love I still believe in these words forever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그저 지쳐서 필요로 만나고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어 하지만 익숙해진 이 고독과 똑같은 일상도 한해 또 한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 등불을 들고 여기서 있을게 먼 곳에서라도 나를 찾아와 인파속에 날 지나칠 때 단 한번만 내 눈을 바라봐 난 너를 알아볼 수 있어 단 한순간에 Cause Here I stand for you 난 나를 지켜가겠어 언젠간 만날 너를 위해 세상과 싸워 나가며 너의 자릴 마련하겠어 하지만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 어서 나타나줘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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